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타크 왕조 (문단 편집) == 몰락 == [[파일:호타키 영묘.png]] [[칸다하르]] 서쪽 외곽에 남아있는 호타키 창건 군주 미르와스 칸의 영묘 하지만 시아파 페르시아인들은 수니파 파슈툰인들을 '벼락출세한 이단 야만족'의 정복으로 여겨 경멸하였으며, 아슈라프 역시 선대 마흐무드의 측근들이랑 충돌하는 등, 호타키 왕조도 분쟁에 휩싸였다. 수도 이스파한이 함락되자 사파비의 왕위 계승자 타흐마습은 6백명만 데리고 북쪽의 [[카즈빈]]을 임시수도로 삼았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지자 1725년에 동쪽의 [[호라산]] 지방으로 피신한다. 호라산에서 아프샤르족과 쿠르드족 5천여 명의 도적떼를 이끌던 '나디르'를 만나게 되었고, 나디르는 타흐마습의 맘루크, '''나디르 칸'''으로써[* 그래서 별칭이 타흐마습 쿨리(타흐마습의 노예)이다.] 몸을 일으켜 1726년부터 그를 도와 길자이 아프간족과의 항쟁과 그의 복수를 돕는다. 도적떼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쌓은 실력으로 여러 차례 호타키 군대를 격파한 나디르는 [[헤라트]]를 점령하고, [[호라산]]을 평정한 공으로 사파비 군대의 사령관 자리에까지 올라 마침내 1729년, 수도 이스파한을 회복하고 아슈라프를 축출, 추살하여 왕자를 타흐마습 2세로 즉위시킨다. -- 여기까지 읽어보면 잔 다르크-- 이로써 나디르는 '''나디르 콜리 벡'''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벡]]은 이름이 아니고 칸이나 샤처럼 칭호를 의미한다. 그러나 호타키 왕조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732년 우선 일종의 완충지대로 있던 압달리 파슈툰 인들의 [[헤라트]]를 점령한 나디르 샤는 1737년부터 동쪽으로 진격하여 호타키 왕조에 대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맨 먼저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 공성전|칸다하르를 점령하였으며]] 1738년에 [[카불]]을 함락하고 아프간 전역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망시키고 복수를 끝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